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스웨덴의 위기와 덴마크의 재참전 ===== 이후 프레데리크 3세는 평화 기간 동안 여러 가지 개혁에 나섰다. 먼저 군제 개혁에 나서서 기존의 용병 의존에서 벗어나 농민 징집병으로 군대를 구성했다. 또한 AD 1702년에는 농노제의 일종인 셸란 섬의 보르네스카브(Vornedskab) 제도를 폐지했다. 그 사이 대북방전쟁은 칼 12세가 승승장구를 하면서 스웨덴령 리보니아에서 아우구스트 2세를 몰아내고 AD 1700년 11월 30일 나르바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그 후 폴란드에 상륙하여 아우구스트 2세를 [[작센 선제후국]]으로 몰아내고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새로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로 세웠다. 하지만 칼 12세가 AD 1709년 6월 27일 [[폴타바 전투]]에서 표트르 1세의 루스 차르국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모든 병력을 잃고 스웨덴 본국으로 후퇴하는 길까지 차단당하자 루스 차르국군의 추격을 피해서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에 고무된 프레데리크 4세는 스웨덴과 체결한 트라벤달 조약을 파기한 후 AD 1709년 6월 아우구스트 2세와 다시 동맹을 맺기 위하여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아우구스트 2세는 8월에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로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자리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2세는 10월 9일 표트르 1세와도 '토른 조약'을 체결하며 동맹을 재건했다. 또한 프레데리크 4세는 10월 22일 표트르 1세와 '코펜하겐 조약'을 체결하면서 덴마크, 루스 차르국, 작센 및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간의 반(反) 스웨덴 삼각 동맹이 부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